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11회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11회를 발췌해놓는다. 원고가 밀려 있어서 오늘 아침까지 헉헉대며 쓴 것이다. 내주엔 한 주 쉴 예정이어서 그나마 숨통이 좀 트일 것 같다. 아니, 트이기를 바래본다.

 

“현실을 허구로 오인하지 말라”라는 주장과 함께 지난 회에 다룬 건 신체 자해자들이나 <피아니스트>의 여주인공의 ‘실재에 대한 열정’이 피하고자 한 것이 비현실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실재 자체라는 지젝의 지적이었다. 그렇다면, 이 ‘실재의 열망’, ‘실재에 대한 열정’은 거부되어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런 입장을 취하게 되면 마지막까지 가기를 거부하는 태도, “외양들(appearances)을 보존하자”는 태도밖에 남지 않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실재의 열망’이 던졌던 문제는 그것이 실재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단지 가짜의 열망이었다는 데 있고, 이 가짜의 열망이 외양들 배후에서 무지막지하게 실재를 찾으려고 노력했다면, 그런 노력은 실재와 마주치기를 회피하려는 궁극적 전략이었다는 데 있다.(<탈이데올로기>, 23쪽; <실재계 사막>, 61쪽)

 

어떻게? 이번에는 프란시스 코폴라의 영화 <지옥의 묵시록>(1979, 감독판 2000)을 예로 들어보자. 지젝을 즐겨 읽은 독자라면 친숙한 예이기도 할 텐데, 영화 속에서 말론 브란도가 연기한 주인공 커츠(쿠르츠) 대령은 “프로이트적 의미의 ‘원초적 아버지’에 해당하고, 어떠한 상징적 법에도 종속되지 않은 외설적 향락의 아버지, 소름끼치는 향락의 실재와 직접 대면하려고 나서는 절대적 주인을 대신한다.”(<탈이데올로기>, 27쪽; <실재계 사막>, 65쪽) 중요한 것은 그가 야만적인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서구 권력 자체의 필연적인 결과물로 제시된다는 점이다. 커츠는 완벽한 군인이었지만 군 권력체계와 자신을 과도하게 동일시했고 결국은 체계가 제거해야 할 과잉이 되었다. “이 영화의 궁극적 지평은 권력이 그 자신의 고유한 과도 잉여를 낳고, 자신이 싸우고 있는 상대를 모방해야 하는 작전을 통해 이 잉여를 없애야만 하는 과정에 대한 통찰이다.” 즉 여기서 문제는 체계로부터의 병리적 일탈이 아니라 체계 자체가 필연적으로 생산해내는 과잉이다. 윌라드는 커츠를 제거하는 비밀작전에 투입이 되는데, 그의 임무는 공식기록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작전을 지시하는 장군의 말대로 “그것은 결코 없던 일이다.”  

(...)

<지옥의 묵시록>의 지평선 너머에 있는 것은 그 계통의 악순환을 일으키는 집단적인 정치활동의 전망이 되는데, 그 계통은 그의 초자아 과잉을 만들어내고, 그 다음엔 그것을 완전 제거하도록 강요된다. 더 이상 초자아의 외설성에 의지하지 않는 혁명적인 폭력이다. 이런 ‘불가능한’ 행동은 진정한 모든 혁명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이다.(<실재계 사막>, 66쪽)

이 대목은 다소 부정확하게 번역됐는데, 첫 문장은 “What remains outside the horizon of Apocalypse Now is the perspective of a collective political act breaking out of this vicious cycle of the System which generates its superego excess and is then compelled to annihilate it”을 옮긴 것이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지평 바깥에 있는 것, 그러니까 거기에 빠져 있는 것은 정치적 집단행동이란 전망인데, 이 정치적 행위란 체계의 악순환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벗어나는’ 것이다. 체계의 악순환이란 이미 예시된 대로 체계가 그 자체의 과잉으로서 커츠와 같은 ‘초자아적 과잉’을 만들어내고 또 그것을 제거해야만 하는 악순환을 가리킨다. 혁명적 폭력은 더 이상 그러한 초자아적 외설성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렇게 ‘불가능한’ 행위, ‘불가능해 보이는’ 행위가 모든 진정한 혁명적 과정의 표지가 된다.  

그러한 행위를 회피한다면 ‘실재에 대한 열정’은 진짜가 아니라 가짜다. 그리고 그 핵심은 권력의 더럽고 외설적인 이면과의 동일시이다. 그 동일시는 영웅적 수임이라는 제스처를 취하는데, 그것은 “누군가 그 더러운 일을 해야 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놔두자!”(<실재계 사막>, 70쪽)가 아니라 “누군가 그 더러운 일을 해야만 한다면, 그래 하자!”(Somebody has to do the dirty work, so let's do it!)는 태도다. 이것은 “그래 내가 책임진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는 ‘아름다운 영혼’적 태도의 뒤집힌 거울상이다(“우리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보아요”라는 말에서 나는 가끔 ‘아름다운 영혼’을 느낀다). 우리가 우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세가 또한 그러한 ‘영웅적’ 태도에 대한 찬양이다. 국가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것은 차라리 쉽다.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은 국가를 위해 범죄까지 저지르는 것이다, 라는 논리가 그러한 찬양에는 깔려 있다.  

지젝이 실제로 거론하고 있진 않지만 그가 사례 목록에는 1980년대 이란 콘트라 사건도 포함돼 있을 것이다. 레이건 행정부가 이란에 비밀리에 무기를 판 돈으로 니카라과 우익반군 콘트라를 지원한 스캔들이다. 이 사건에 대한 의회 청문회에서 작전의 ‘악역’을 맡았던 올리버 노스 중령이 당당하게 국가를 위한 자신의 애국심과 신념을 밝혀서 ‘영웅’으로 부상하기도 했었다. 자신이 ‘범죄’를 저질렀다고 하지만 그것은 국가를 위한 것이었다는 변호였다. 레이건에서 노스가 있었다면, 히틀러에겐 히믈러가 있었다. 이건 지젝이 직접 들고 있는 사례인데, 히믈러는 1943년 10월 4일 포젠에서 SS 지휘자들에 대한 연설을 통해 유대인 대량학살이 “우리 역사의 영광스러운 한 페이지이자 결코 씌어진 적도 결코 씌어질 수도 없는 한 페이지”라고 노골적으로 말했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는 여자와 어린아이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는 물음과 직면하게 됩니다. 나는 여기서도 전적으로 명쾌한 해결책을 찾기로 했습니다. 나는 남자들을 절멸시키는 것이 스스로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즉 그들을 죽이거나 죽이도록 한 일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의 아이들이 자라나서 나중에 우리의 아이와 손자들에게 복수하도록 내버려두는 것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이 민족이 지구상에서 사라지도록 하는 어려운 결단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바로 다음날 SS 지휘자들은 히틀러가 소집한 회의에 참석해야 했는데, 히틀러는 전황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최종 해결책’을 공개적으로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히믈러가 ‘총대’를 맨 터라 그들 간에 공유된 음모를 넌지시 암시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독일 국민 전체는 이것이 사활이 달린 문제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후방의 다리는 파괴되었다. 오직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지젝은 실재에 대한 ‘반동적인’ 열정과 ‘진보적인’ 열정을 이론적으로는 대립시킬 수 있으리라고 본다. ‘반동적’ 열정이 법의 외설적 이면에 대한 보증․배서라면, ‘진보적’ 열정은 (‘정화에 대한 열정’에 의해 부인된) 적대라는 실재와의 대면이다. 좌파와 우파 모두에서 실재(계)는 적대를 도입하는 과잉적 요소를 파괴함으로써 접촉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여기서 지젝은 실재를 우리가 직접 대면할 수 없는 ‘끔찍한 괴물(terrifying Thing)’로 보는 표준적인 비유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궁극적인 실재는 상상적인 베일이나 상징적인 베일에 감춰진 어떤 것이 아니다. 기만적인 외관 밑에 우리가 직접 쳐다보기엔 너무나 두려운 ‘궁극적 실재라는 괴물(ultimate Real Thing)’이 존재한다는 생각 자체가 궁극적인 외관(ultimate appearance)이다. 이 실재라는 괴물은 그 존재를 통해서, 혹은 존재한다는 가정을 통해서 우리의 상징적 세계의 일관성을 보장해주는 한편, 그 구성적 비일관성(적대)과의 대면은 회피하게 해주는 환영적 유령(허깨비)일 뿐이다.  

(...) 

10. 0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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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4 17: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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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5 01: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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